등산/지리산

지리산 최정상 천왕봉에 원봉이 서다.(1,915m /2015년5월16일)

Auolelius 2015. 5. 17. 21:46

 

지리산하면 바로 즉시 떠오르는 잊지 못할 세가지 사연이 생각난다.

첫번째는

1962년 여름 대학 1년 때 당시 태권도 3단(4단?)인 친구 최아무개

(형사 반장으로 정년 퇴임한 전주 공설운동장의 봉화를 든 동상의 모델)와

단 둘이 구례 화엄사에서 부터 탐방을 시작하여

노고단~천왕봉까지의 종주코스를 겁도없이 탐방했었다.

 

지금처럼 길이 나 있지도 않아서

길을 만들면서 가야했고

밤에는 시뻘건 눈이 광채처럼 번뜩이는 짐승들 때문에

군용 A텐트의 딱딱이만을 풀고 궁둥이를 내밀고

대변을 봤던 기억도 생생하다.

 

당시 공비 2명이 지리산에 나타났다고

종주구간 일부를 차단하고 난리였는데도 ...

 

전해인 1961년도엔 깻잎이란 별명의 고교 친구가

상백무와 중백무 사이의 평소에는 물도 흐르지 않는 곳에서

태풍(사라호였는지? 노라호였는지?}의 세례를 받고

급류에 휘말려 저 세상으로 간 뒤라서

무덤의 풀도 깍아주고 살펴보기도 했었다.

 

경희대 산악부의 마나술루 원정대 대원이였던

체육대학에 다니던  친구 권아무개가 있어서

판초 우의 뿐인 우리 둘은 원정 단장의 배려로

그 친구와 같은 텐트에서 자기도 했는데...

 

천왕봉을 오를 때엔 길이 없어서

원정대원 전체가

상백무에서 살던 외팔이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야만 했었다.

 

두번째 탐방은

1970년 휴가 때 회사원 동료들을 데리고

6명이 화엄사의 절방에서 방을 얻어 자기로 했는데, 

나와 서아무개 홍보담당자와 둘이서는

밤새도록 소주파티를 벌이다가

잠시 눈도 붙이지 못하고

새벽 5시에 노고단쪽으로 오르면서

내가 가져간 텐트 두 벌을 부속품

(지주용 뽈대와 쇠팩들과 끈 등등)까지, 

또 며칠동안 일행들이 먹을 쌀도 포함하여

모두 내가 질머지고 오르는데,

 

술독이 단단히 올라 한발자국 가다간 토하고

나중엔 기어가다가도 계속 토하면서도

먼저 올라가게 한 우리 일행들의 휴가를 망칠까 두려워서

악착같이 약속 장소인 샘터까지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에 도착하여

다섯명을 포함한 샘터에 있던 등산객들의

우뢰같은 반가움의 박수세례를 받았고,

 

깜깜한 밤중에 텐트치고 밥해 먹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3+3 , 6명이었는데,

나의 지구력과 책임감에 반했던

여사원의 대시가 강력했지만

(지금 누구의 망구 노릇을 하고 있을까?),

당시엔 결혼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있던 터라서... 

 

세번째로 떠오르는 사연은

1990년 10월 초 연휴에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거주 하면서 내 개인 사업할 때인데

서초동의 모 성당에서 사귄

두 살 후배와 그의 친구와 셋이서

백무동 여관에서 자고 새벽에 천왕봉을 향해 오르던 중

내 두 다리에 아주 강력한 쥐가 나서

한 발자욱도 뗄수 없이 되었는데

성당 친구는 날 도와줄 생각도 먼저간다는 말한마디도 없이 후울쩍 달아나

혼자서 천왕봉으로 향했고,

그의 친구는 어정쩡하게 있었지만

난 그분에게 그냥 가라고 하고는

혼자서 기어가던중

거제도에서 건설업을 하신다는 사장님이 나를 발견하고는

내 두 다리를 맛사지 해 주시고

내게 자기의 스틱 한개를 주면서 짚고 가라고 해서

짚고 가다가 점점 다리가 풀려서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오르다가

하산 중인 성당친구를 만나서 뱀사골 산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밤 늦게 12시경에

뱀사골 산장에 도착하여

넘 추워서 산장에 묵으려했는데,

등산객이 넘쳐나서 거의 모든분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새우잠을 자며

더 이상의 등산객 입장을 못하도록

산장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궈 놓은 바람에

밖에서 자려고 침낭에 누웠으나

영하의 추위로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사장님과 성당후배의 친구와 난

쓰레기통을 뒤져

카톤 박스를 몇 개 발견하여

화장실의 바닥에 깔고 두어 시간 눈을 부친 후

새벽에 기상하여 뱀사골쪽으로 내려가서 주차장에 도착하여

성당 후배를 만났더니,

 

그 후배는 자기 친구에게 우리가 늦게 내려왔다고

노발대발 화풀이를 있는대로 하고는

우리들의 말은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차를 너무 난폭하게 몰아 뒷 좌석에 앉은 내 머리가

승용차의 천장에 붙었다 떨어졌다를 거듭한 끝에

대전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

내가 드디어 폭발해서 ...

 

그뒤로 그 후배와는 상대하기도 싫어했다.

 

동행한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그 산행은 포기해야 하던가

뒤를 돌봐주는게 원칙인데...  

인간성이 돋보이는 산행인지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난, 스틱을 빌려준 고마운 사장님께 스틱을 반환하려고

휴가를 내어 거제도를 방문했더니

그분은 오히려 나를 환대하면서

호텔비와 식사는 물론 거제도 관광까지 시켜주신

그 고마운 사장님을 평생토록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도 지리산 종주는 여러번 더 했었다.

 

 

 

 

 

 

1962년 탐방시엔 저 절벽의 벽면에 박정희라고 한문으로 무지 크게 글을 새겨 놓았었는데...